[다산칼럼] 문명 주변부의 예술

입력 2024-03-31 18:09   수정 2024-04-01 00:07

김혜순의 시집 <날개 환상통>의 영역본 가 2023년도 ‘미국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이미 구미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 시인인 터라, 갑작스러운 수상은 아니다. 그래도 영역된 시들이 구미 비평가들의 상찬을 받은 일은 주목할 사건이다.

연원이 다른 사회들 사이의 교섭은 교역으로 시작된다. 비교 우위에 바탕을 둔 터라서, 그런 교역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교역으로 밀접해지면, 어쩔 수 없이 충돌과 정복이 나온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두 사회는 점점 많은 정보를 공유하게 된다. 이주, 교혼 및 병원체의 확산을 통한 생물적 정보들이 먼저 공유되고, 이어 물건을 만드는 물질적 기술과 사회를 조직하는 사회적 기술이 공유된다.

마지막으로 공유되는 것은 예술이다. 예술이 사람들의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므로, 예술의 공유는 늦게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공유는 대체로 음악, 무용, 연극, 미술, 문학 순서로 나온다. 거대한 상징체계인 언어를 매체로 삼으므로, 문학의 공유는 더딜 수밖에 없다.

문학에서도 시가 공유되기 특히 어렵다. 시가 본래 상징성이 강한 데다, 그것의 매체가 된 언어의 특수성과 운율을 깊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시는 ‘가족 농담(family jokes)’에 가깝다는 얘기도 있다. 가족만 아는 정보들에 바탕을 둔 농담과 비슷하다는 얘기다.

바로 그런 사정이 <날개 환상통> 영역본의 수상에 큰 뜻을 부여한다. 과감하게 말하면, 이번 경사는 문명의 주변부인 우리 사회가 중심부에 진입했음을 가리키는 이정표들 가운데 하나다. 이미 다른 예술 분야들에선 중심부에서 받아들여진 작품들이 나왔다. 문학에서도 소설은 신경숙이나 한강 같은 작가들이 명성을 얻었다. 이제 공유가 가장 어려운 시에서도 세계화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민족이 살아온 한반도와 만주 동남부는 늘 인류 문명의 주변부의 주변부였다. 현생 인류가 7만 년 전부터 동아프리카에서 북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므로, 인류 문명은 자연스럽게 서남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에서 먼저 발전했고 둘레로 퍼졌다. 자연히 동아시아는 문명의 발전이 늦었다. 신석기 혁명이 널리 퍼졌을 때 서양과 동양 사이의 격차는 대략 2000년이었다.

문명이 발전하자 서양과 동양 사이의 거리는 줄어들었고, 마침내 로마 제국과 진한(秦漢) 제국은 인도양의 뱃길, 내륙의 ‘비단길’ 및 북쪽의 ‘초원 고속도로’로 연결되었다. 동서양 사이의 격차도 줄어들었다.

강대해진 한 제국의 팽창은 고조선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낙랑이 중국 문명의 도관이 된 뒤, 한반도와 만주 동남부의 조선족은 발전된 문명을 받아들여 역량을 키웠다. 그리고 4세기 초엽엔 낙랑을 쫓아냈다. 그 뒤로 한반도는 중국 문명의 주변부로 남았다.

16세기 이후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치른 서양은 동양을 압도했다. 서양 문명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일본이 동양 문명의 새 중심부가 되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은 그 뒤로 서양 문명을 효과적으로 받아들여 단숨에 중세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도약했다.

문명적으로 주변부의 주변부였고 끝내 식민지로 전락했던 민족이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여 부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두 번이나 그렇게 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런 사회가 문명의 중심부로 진입한 것은 큰 성취다.

정보 혁명이 가속되는 터라, 인류 문명은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구별이 점점 약해진다. 이미 경제와 기술에선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예술에서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김혜순의 수상은 가리킨다.

안타깝게도 북한은 지옥의 모습을 점점 짙게 띤다. 정권의 생존을 핵무기에 의존하면서, 남북한의 민족적 동일성마저 부정하는 정책적 파산을 맞았다. 그래도 우리 예술가들은 북한 동포들의 참상도, 북한을 탈출한 난민들의 절박한 처지도 외면한다. 그런 태도로 어떻게 문명의 주변부의 주변부에서 끈질기게 정체성을 보존해온 우리 민족의 경험에 진실된 질서를 부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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